어느 날 바람이가 짖었다. 산책 길에서 낯선 강아지와 마주쳤을 때였다. 앞발을 두 번 구르며 캉캉 짧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돌아보니 바람이가 낯선 강아지를 보고 짖고 있었다.샘이는 그렇게 짖지 않는다. ‘왈왈왈왈. 상암동 내 거야, 이거 다 내 땅이야. 그러니 넌 여기로 오지 말고 저쪽으로 돌아가.’ 이렇게 외치듯이 깡총거리며, 아주 난리 블루스를 추며 짖어댄다. 목줄을 세게 잡아당겨야 할 만큼 막무가내로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기도 한다. 그렇게 달려들어서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샘이가 어떻게 하나 보고 싶어 목줄을 확 놔버릴
일본의 작가 나카노 히로미가 쓰고, 동물 사진 작가로 유명한 두 명의 사진 작가가 함께 작업했다는 『강아지 도감』을 『고양이 도감』과 함께 학교 도서관에 들여놓았다. 아이들은 이 책이 너무 재미있다며 서로 보겠다고 야단이어서 나중에 다섯 권을 추가로 주문했다. 사진을 찍는데 8년이 걸렸다는 『강아지 도감』을 나도 입시 공부하듯이 읽고 또 읽었다.그 중에서 ‘푸들’에 대한 해설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띄었다. ‘푸들: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분위기의 개.’ 우리 집 푸들, 그 중에서도 샘이에게 꼭 맞는 말이었다. 샘이는 딱 여왕 같았
오랜 고민 끝에 바람이에게 백내장 수술을 시켜주기 위해 동물병원을 찾아갔다. 수술비 삼백만 원이 큰돈이긴 하지만 바람이가 이제 겨우 네 살이니 앞으로 십 년 동안은 빛을 보며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동물병원을 몇 군데 다녀본 후 결정한 우리 아이들의 단골 병원이었다. 하지만 피 검사를 비롯해 여러 복잡한 검사를 마친 의사 선생님은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바람이는 심장이 약해 마취를 견딜 수 없으니 수술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앞도 보지 못하는 아이가 심장까지 약하다니… 그 엄청난 말에 바람이가 너무나 가여워 나는 그만
젖을 떼고 걸음마를 거쳐 뜀박질까지 두루 학습한 별이에게 강아지로서 남은 과제는 딱 하나, 짖는 일이었다. 어미의 미모 뿐 아니라 총기도 고스란히 물려받아 학습 능력이 뛰어난 별이는 ‘짖음’에 있어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별이는 하루 종일 짖었다. 기척이 난다거나 누가 온다는 등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짖는 샘이와는 달랐다. 그 아이는 이유 없이 그냥 짖었다. 짖는 것을 연습하듯이, 즐기듯이, 과시하듯이. 아니, 짖는다는 행위가 자기의 막중한 임무며 존재 이유인 듯이 짖어댔다. 이 아파트에 처음 들어올 때 ‘강아지를 키
둘도 없는 단짝으로 지내온 하늘이와 별이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유치원생인 자기 딸이 매일 강아지, 강아지 노래 를 부른다는 친한 동료 선생님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늘이는 젖을 떼고 한 달쯤 지난 9월에 낯선 집으로 가게 되었다. 하늘이를 보내기로 진작 정해두어서 애당초 정을 주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우리 집에서 태어나 석 달 남짓 날마다 별이와 함께 꼼지락거리며 놀던 아이를 다른 데로 보내려니 가슴이 몹시 아팠다. 하지만 강아지를 네 마리나 키우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여름방학이 되어 바람이와 샘이, 어린 남매 하늘이와 별이까지 네 마리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단양집을 찾았다. 덥고 시끄러운 서울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있을 우리 강아지 가족들에게 평화로운 전원생활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강아지도 차멀미를 한다. 예전에 까미도 단양에서 서울로 갈 때면 꼭 멀미약을 먹였다. 애견 전용 멀미약 같은 것은 본 적이 없기도 했고, 있다 해도 단양 산골에서 그런 약을 구하기는 어려워서 동물병원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사람 멀미약의 절반 정도만 먹이라고 일러주었다. 차멀미는커녕 뱃 멀미도 잘 안
아가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눈을 뜨고, 꼬물꼬물 기어다니기도 하며 서서히 거실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이름을 지어줄 때가 되었다. 세라 브라이트먼의 공연날 태어났고, 내가 그 가수를 좋아하기도 하니까 한 녀석 이름은 ‘세라’ 로 지을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외국어 이름은 내키지 않 았다. 어느 날 새끼들 가운데 특히 더 작고 예쁜 사내놈을 안고 어르면서 안치환의 노래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흥얼거렸다. “아가야,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나 나에게 온거야?”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네 이름은 별이야. 이렇게 별처
까미도 그러더니, 우리 집 암놈 강아지 샘이는 연애 백 단에 내숭은 오백 단이었다. 내 앞에서는 바람이에게 쌀쌀맞게 굴고, 간식 시간이면 바람이 것까지 날름 가로채 먹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람이가 내 곁으로 슬슬 다가오기라도 하면 그 앞을 가로막으면서 얼씬도 못 하게 한 채 오직 자기만 안아주고 예뻐해 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새침데기 폭군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요 앙큼한 가시내야, 도대체 나 학교 가고 없는 낮 동안 무슨 일을 벌인 거야? 바람이랑 그렇고 그랬으면 정다운 척이 라도 해야지, 왜 그리 서방님을 구
대체로 이름이란 당사자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게 마련이다. 사람도 그렇고 동물도 그러하다. 그런데 ‘아롱이’라는 이름은 한없이 밝고 철없이 귀엽기만 했다. 너무 흔하기도 했다. 저렇게 버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강아지에 게는 좀더 비장미 넘치는 다른 이름이 있어야 했다. 나는 새 이름을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4년 동 안 줄곧 들어온 이름이 있으니 어감이 전혀 다른 생뚱맞은 이름을 지어줄 수는 없었다. 여러 날 궁리한 끝에 ‘아롱이’와 어 감도 비슷하고, ‘넌 눈이 멀어 마음대로 못 다니지만 마음만은 바람처럼 어
아무래도 이별이 쉽지 않았던지 여자는 자기 차로 우리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단양에서만 내 차를 사용하고 있어서, 단양역 광장에 세워놓고 왔다. 강아지들과 택시를 타고 가려 했는데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봤는데도 덥석 나에게 안긴 세미와 달리 아롱이는 제 주인 품만 파고들었기에 어떻게 매정하게 떼어내서 데려가나 걱정하던 참이기도 했다. 그 여자도 아이들이 새로 살게 될 집이 어떠 한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차에 오르니 세미가 벌써 운전석에 앉은 여자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는다. 많이 해본 솜씨인 듯 세미는
까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흘렀다. 까미 대신이라며 후배 교사와 학부모님이 데려다주었던 강아지들은 한동안 내 슬픔을 달래주었으나 이상하게 끝까지 내 곁에 머물지 못했 다. 달마시안 루루는 흔치 않은 외모와 희귀성, 영화 주인공 이라는 매력까지 더해져 많은 사람에게 칭찬과 애정을 듬뿍 받았다. 101마리 달마시안이 영화에만 있는 줄 알았다가 실제로 보고 홀딱 반한 어린 조카 효식이는 저희 집 옥상에 잘생긴 진돗개가 있는데도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루루를 달라고 졸라댔다. 사실 까미의 친정은 효식이네였다. 그 집에서 태어나 두어 달쯤
까미가 하늘나라로 갔다.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한밤중에 갑자기 토하고 누워만 있더니 아침에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가는 길에 길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아픈 까미를 두고 출근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간고사 시험감독을 세 시간 하고 난 후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니는 그 소식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주셨다. 집에서 연락이 없어 까미가 무사한 줄 알았는데, 아마 어머니는 슬픈 소식을 차마 전할 수 없어 내게 연락을 안 하신 모양이었다. 까미를 잃은 슬픔과 후유증은 오래갔다. 나는 일주일 동안 화장도 하지
단양에서 4년여 동안 나와 행복하게 살았던 까미는 나의 복직과 더불어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까미를 다시 만난 부모님은 무척 좋아하셨다. 까미 새끼들인 악동 삼총사는 이미 친척집 여기저기로 업혀가 그들의 소행과 상관없이 귀염 받으며 잘 살고 있었고, 착한 어미 까미는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까미의 귀환을 환영해준 것은 우리 가족만이 아니었다. 제천의 고등학생들에 이어 이번에는 서울의 중학생들이었다. 중학생들은 툭하면 까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기 일쑤 였다. 국어 과목이 좋은 건 교과 내용의 범위가 다양하고 광범위해서
우리 마을에서 소백산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끝자락에 작은절이 한 채 있었다. 절이라기엔 너무 작고 암자라기엔 조금 큰 그 절은 조계종도 태고종도 아닌 낯선 종파였다. 그 절은 늘 비어 있는 듯 고요했는데 어느 날부터 요사채를 정비하더니 거기에 사람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스님도 아니고 일반인들이. 새밭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그 절 바로 맞은편에 멋진 계곡 이있었다. 우거진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뜻밖의 비경이 나타난다. 소백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푸른 물이 가득 고인 깊은 계곡은 무척이나 수려하고 아름다웠
야트막한 돌담 너머 우리 앞집엔 여러 동물 가족이 살고 있 었다. 잘생긴 암소와 송아지, 아침에 개울가 풀밭으로 출근해서 종일 풀을 뜯어먹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면 집으로 퇴근하는 염소, 여러 마리 중닭 그리고 늘 묶여있는 누런 똥개. 뒤뜰은 병아리들이 구구대는 소리와 소란스런 몸짓으로 부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름이 되면 중닭 정도로 자라 살이 통통해진 녀석들이 활기차게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놀았다. 하지만 닭들은 여름휴가 기간에 끊이지 않는 친척과 손님들 접대용으로 한 마리 두 마리씩 사라지기 시작해,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거의
이왕 시골에서 사는 것, 시골살이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싶은 마음에 새 가족들을 입양하기로 했다. 그래서 단양 장날 오리와 토끼를 몇 마리씩 사가지고 왔다. 닭은 이미 시골에 내려온 첫해 병아리 몇 마리를 산 것이 대가족을 이루어 잘생기고 시끄러운 장닭과 여러 마리의 아내 닭들, 병아리들까지 종일 마당을 구구거리면서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한 번도 키워본 적 없는 닭 키우기에 비교적 성공한 셈이니,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를 잘 썼다고 학교에서 부상으로 받아 일 년 남짓 키워본 경험이 있는 토끼는 한결 쉬울 것 같았다. 사방 천지
소백산 자락에서 순하고 착한 강아지 까미와 함께 보내는 나날들은 단조로우면서도 풍성했다. 한드미 마을의 단양집 바로 앞에는 새밭 계곡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 동네가 유명한 생태관광지가 되어 늘 관광객들 로 넘쳐나지만 그 시절에는 고요하고 호젓했다. 내가 그 집을 구하던 당시에는 가곡 삼거리에서부터 비포장길이 이어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마을 사람들의 친척이 외지에서 놀러올 때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동네 사람들이 전부 밭으로 일하러 나가고 없어 마을에 개미 새끼 하나 얼씬대지 않
다른 집도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항상 개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첫 강아지는 ‘바둑이’였다. 몸에 점이 있는 바둑이가 아니라 누런 잡종 강아지로 작은 시골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신도에게 선물받은 강아지였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특별히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털 색깔에 따라 누렁이, 흰둥이, 검둥이로 불렀다. 젊은 부부는 마냥 들떠서 온갖 예쁜 이름들을 후보로 올려놓고 작명하 는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딸이 강아지를 보자마자 강아지 이름을 불렀다. “아, 바둑이가 왔네? 바둑
단양에서 살기 시작한 첫 해 여름, 서울의 가족이 우리집으로 휴가를 왔다. 결혼한 여동생 가족도 온다고 해서 나는 귀여운 조카들을 볼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다. 신이 나서 여러 날 동안 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심지어 마당의 댓돌까지 물걸레로 닦을 정도였다. 댓돌 아래에는 앙증맞은 채송화가 고만고만 예쁘게 피어 있었다. 여름날의 반짝이는 미소와도 같은 꽃. ‘시골에서 살게 되면 꼭 댓돌 아래 채송화를 심어야지.’ 언제부턴가 나는 오랫동안 그런 꿈을 지니고 살았다. 시골에 살게 될지 어쩔지도 모르면서 시골에 살면 무조건 댓돌 아래 옹
행복하던 정선에서의 나날들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갑자 기 끝났다. 그냥 끝나버렸다. 경치 좋은 화암 약수터로 놀러 온 정선군 내 다른 보건소 동료들과 함께 차를 타고 정선읍으 로 나가던 내 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 동 생 운택이만. 나는 내 손으로 죽은 동생의 사망신고서를 썼고, 동생의 유 품을 정리했으며 보건소에 쫓아와서 통곡하는 보건소 단골 산골 할머니들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내가 날마다 정성껏 다 림질하던 하얀 가운을 차곡차곡 개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또 쏟아져 가운은 흥건히 젖었고, 결국 나는 짐을 정리하다